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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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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럴드 윌슨(1916-1995)은 1964년부터 1970년,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총리를 역임한 정치인이다. 로디지아 문제, 베트남 전쟁,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 등 외교 정책과 사회 개혁,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윌슨은 노동당 대표를 역임하며 사형 폐지, 동성애자 법령 비범죄화 등 사회적 개혁을 이끌었고, 교육 기회 확대와 복지 국가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경제적 어려움과 논란이 있었으며, 퇴임 후에는 음모론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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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윌슨
기본 정보
이름제임스 해럴드 윌슨, 리볼크스 남작 윌슨
출생 이름제임스 해럴드 윌슨
출생일1916년 3월 11일
출생지코울러스리, 웨스트 라이딩 오브 요크셔, 잉글랜드
사망일1995년 5월 23일
사망지런던, 잉글랜드
안장 장소세인트 메리 올드 교회, 세인트 메리, 실리 제도, 잉글랜드
정당노동당
배우자메리 윌슨 (본명: 볼드윈) (1940년 1월 1일 결혼)
자녀2명, 로빈 포함
모교지저스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교
직업정치인
작가
강사
전문 직업공무원
1975년 윌슨
해럴드 윌슨의 초상화
1966년 촬영된 해럴드 윌슨
1986년의 해럴드 윌슨
칭호 및 훈장
칭호각하
총리
직위영국 총리
재임 기간 (첫 번째)1964년 10월 16일 – 1970년 6월 19일
재임 기간 (두 번째)1974년 3월 4일 – 1976년 4월 5일
군주엘리자베스 2세
이전 총리 (첫 번째)알렉 더글러스흄
다음 총리 (첫 번째)에드워드 히스
이전 총리 (두 번째)에드워드 히스
다음 총리 (두 번째)제임스 캘러한
제1 국무장관조지 브라운
마이클 스튜어트
바버라 캐슬
노동당 대표
직위노동당 대표
재임 기간1963년 2월 14일 – 1976년 4월 5일
부대표조지 브라운
로이 젠킨스
에드워드 쇼트
이전 대표휴 게이츠컬
다음 대표제임스 캘러한
야당 대표
직위야당 대표
재임 기간 (첫 번째)1970년 6월 19일 – 1974년 3월 4일
총리 (첫 번째)에드워드 히스
군주 (첫 번째)엘리자베스 2세
이전 야당 대표 (첫 번째)에드워드 히스
다음 야당 대표 (첫 번째)에드워드 히스
재임 기간 (두 번째)1963년 2월 14일 – 1964년 10월 16일
총리 (두 번째)해럴드 맥밀런
알렉 더글러스흄
군주 (두 번째)엘리자베스 2세
이전 야당 대표 (두 번째)조지 브라운
다음 야당 대표 (두 번째)알렉 더글러스흄
정부 부처 직책
무역위원회 의장총리: 클레멘트 애틀리
재임 기간: 1947년 9월 29일 – 1951년 4월 23일
이전 의장: 스태퍼드 크립스
다음 의장: 하틀리 쇼크로스
해외 무역 담당 비서총리: 클레멘트 애틀리
재임 기간: 1947년 7월 10일 – 1947년 9월 29일
이전 비서: 힐러리 마르캉
다음 비서: 아서 보텀리
공공사업부 의회 비서총리: 클레멘트 애틀리
장관:
조지 톰린슨
찰스 키
재임 기간: 1945년 7월 26일 – 1947년 7월 10일
이전 비서: 레지널드 매닝햄-불러
다음 비서: 에반 더빈
그림자 내각 직책
그림자 외무장관대표:
휴 게이츠컬
조지 브라운
재임 기간: 1961년 11월 2일 – 1963년 2월 14일
이전 외무장관: 데니스 힐리
다음 외무장관: 패트릭 고든 워커
그림자 재무장관대표: 휴 게이츠컬
재임 기간: 1955년 12월 14일 – 1961년 11월 2일
이전 재무장관: 휴 게이츠컬
다음 재무장관: 제임스 캘러한
의회 직책
상원 의원신분: 세속 귀족
재임 기간: 1983년 9월 16일 – 1995년 5월 24일
직책: 종신 귀족
하원 의원 (하위튼 선거구)재임 기간: 1950년 2월 23일 – 1983년 5월 13일
이전 의원: 선거구 설립
다음 의원: 선거구 폐지
하원 의원 (옴스크릭 선거구)재임 기간: 1945년 7월 5일 – 1950년 2월 3일
이전 의원: 스테픈 킹홀
다음 의원: 로널드 크로스
관련 정보
해럴드 윌슨의 문장
서명
공식 웹사이트영국 정부의 해럴드 윌슨 소개 페이지

2. 어린 시절과 교육

웨스트요크셔 주 허더즈필드에서 태어난 윌슨은 정치적인 가족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허버트 윌슨(1882~1971)은 자유당에서 활동하다가 후에 노동당에 입당한 직장 화학자였다. 그의 모친 에셀 세든(1882~1957)은 결혼 전 학교 교사였다. 윌슨은 8세 때 런던을 방문하여 다우닝가 10번지 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은 훗날 유명해졌다.[7]

윌슨은 지방 그래머 스쿨인 로이즈 홀 세컨더리 스쿨에서 수학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았다. 1931년, 스카우팅 중 오염된 우유를 마시고 장티푸스에 걸려 몇 달간 회복 기간을 가져야 했다. 이듬해 산업 화학자였던 부친이 실직하면서 가족은 위럴반도 머시사이드 주 스피탈로 이주하였다. 윌슨은 위럴 그래머 스쿨에서 6학년을 다녔고, 수석 학생을 지냈다.

가터 훈장을 받은 해럴드 윌슨의 현수막. 그가 PPE를 공부했던 옥스퍼드대학교 예수 대학 예배당에 걸려 있다.


윌슨은 옥스퍼드대학교 예수 대학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PPE)을 전공하여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고, 여러 학술상을 받았다.[10] 21세에 옥스퍼드 대학교 경제학 강사가 되었고, 뉴 칼리지에서 경제사 강사,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 1. 어린 시절

웨스트요크셔 주 허더즈필드에서 태어난 윌슨은 정치적인 가족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허버트 윌슨(1882~1971)은 자유당에서 활동하다가 후에 노동당에 입당한 직장 화학자였다. 그의 모친 에셀 세든(1882~1957)은 결혼 전 학교 교사였다. 윌슨은 8세 때 런던을 방문하여 다우닝가 10번지 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은 훗날 유명해졌다.[7]

윌슨은 지방 그래머 스쿨인 로이즈 홀 세컨더리 스쿨에서 수학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았다. 1931년, 스카우팅 중 오염된 우유를 마시고 장티푸스에 걸려 몇 달간 회복 기간을 가져야 했다. 이듬해 산업 화학자였던 부친이 실직하면서 가족은 위럴반도 머시사이드 주 스피탈로 이주하였다. 윌슨은 위럴 그래머 스쿨에서 6학년을 다녔고, 수석 학생을 지냈다.

2. 2. 교육

윌슨은 요크셔주 허더즈필드에 있는 로이드 홀 문법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8] 그의 아버지는 산업 화학자로 일하다가 1930년 12월에 정리해고되었고, 2년 가까이 구직 활동을 한 끝에 위럴 반도에 있는 스피털로 이주하여 일자리를 구했다. 윌슨은 위럴 남학생 문법학교에서 6학년 과정을 이어갔고, 수석(Head Boy)을 맡았다.

윌슨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전시 장학금을 받았다. 이 장학금과 주정부 지원금으로 1934년부터 옥스퍼드대학교 예수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에서 윌슨은 자유당 당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G. D. H. 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의 정치학 교수 R. B. 맥캘럼은 윌슨을 자신이 가르친 학생 중 최고라고 평가했다.[9] 윌슨은 철학, 정치학, 경제학(PPE)을 전공하여 졸업 시험에서 모든 과목 최고 점수를 받는 등 뛰어난 1등급 학사 학위를 받았고, 여러 주요 학술상을 수상했다.[10] 전기 작가 로이 젠킨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 학업 성적은 그를 , 글래드스톤, 애스퀴스와 같은 총리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그는 독창성이 부족했다. 그가 뛰어났던 것은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고, 마음속에 정리하며, 시험관들이 환영할 만한 형태로 명료하게 제시하는 능력이었다.[11]

윌슨은 학계에 남아 21세의 나이에 20세기 가장 젊은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1937년부터 뉴 칼리지에서 경제사 강사를 역임했고,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연구원(fellow)으로 일했다.

3. 대학 시절과 전쟁 복무

윌슨은 학교에서 뛰어났으며, 1934년 옥스퍼드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서 근대사를 전공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윌슨은 노동당원으로 정치에 참여하였고, G. D. H. 콜의 영향을 받아 노동당에 입당, 철학, 정치학,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1등급 학위로 졸업하였다. 그는 학문에서 지속하여 최연소 옥스퍼드 대학교 명사 중 한 명이 되었고, 뉴 칼리지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강사를 역임하였다. 이 시기 윌리엄 베버리지의 연구 조교였다.[1]

1940년 그는 메리 볼드윈과 결혼하여, 2명의 아들( 수학자 로빈 윌슨과 가일스)을 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에 윌슨은 복무를 지원하였으나 전문가로 분류되어 문관 근무로 들어가 석탄 산업 통계학자경제학자로 복무 하였고, 1943년 ~ 1944년 동력부에서 경제·통계학 국장을 역임하였다.[12]

그는 통계학에 열정을 유지하여, 무역위원회 의장(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으로서 1947년 무역 통계법(Statistics of Trade Act 1947) 제정을 주도했고, 총리 재임 시절 클라우스 모저(Claus Moser)를 중앙통계청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3. 1. 대학 시절

윌슨은 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었다. 비록 장학금을 받는 데는 실패했지만, 1934년부터 옥스퍼드 대학교지저스 칼리지에서 근대사를 전공할 수 있도록 카운티 보조금을 받아 전시회를 열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윌슨은 노동당 당원으로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후에 G. D. H. 콜의 영향을 받아 노동당에 입당하였다. 첫 해가 지난 후, 그는 철학, 정치학, 경제학으로 전공 분야를 바꾸었고, 뛰어난 1등급 학위를 받으며 졸업하였다. 그는 학문적 경력을 이어가며, 그 세기 최연소 옥스퍼드 대학교 명사 중 한 명이 되었다.[1]

윌슨은 1937년 뉴 칼리지에서 경제학 강사를, 1938년부터는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경제 역사학 강사를 역임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실업과 거래 주기에 대해 윌리엄 베버리지의 연구 조교로 활동하기도 했다.[1]

3. 2. 전쟁 복무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윌슨은 군 복무를 자원했지만, 전문가로 분류되어 민간 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전쟁 기간 대부분을 석탄 산업의 통계학자이자 경제학자로 보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연료 및 동력부(Ministry of Fuel and Power)의 경제 및 통계국장을 역임하였다.[12]

윌슨은 통계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였다. 1943년 왕립 통계학회(Royal Statistical Society)의 회원이 되었으며,[13] 무역위원회 의장(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으로서 1947년 무역 통계법(Statistics of Trade Act 1947) 제정을 주도했는데, 이 법은 현재까지도 영국 대부분의 경제 통계를 규율하는 권한이다. 총리 재임 시절, 클라우스 모저(Claus Moser)를 중앙통계청의 수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4. 정치 경력

1945년 총선에서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윌슨은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곧바로 노동부 정무차관으로 임명되었고, 2년 후에는 해외무역 서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7년에는 31세의 나이로 상무성 장관에 임명되어, 20세기 영국 내각 최연소 장관이 되었다. 그는 "통제의 모닥불"이라 불리던 전시 배급제 일부를 폐지하는 데 앞장섰다.[12]

윌슨은 노동당 내에서 "좌익"으로 여겨졌으며, 한국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을 이유로 국민보건서비스 의료 의무 도입에 반대하여 1951년 4월 정부에서 사임했다. 이후 야당 생활을 하면서, 1955년에는 노동당 조직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여 당 조직을 낡은 고륜자전거에 비유하며 개선을 위한 다양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28]

1960년, 윌슨은 휴 게이츠컬에게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1962년에는 부대표직에 도전했으나 조지 브라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1963년 1월 게이츠컬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윌슨은 노동당 대표 경선에 출마하여 승리했다.

1964년 영국 총선 운동 기간 동안, 윌슨은 프러퓨모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보수당 정부와 앨릭 더글러스흄을 공격하며 지지율을 높였다. 특히, 1963년 노동당 연례 회의에서 "과학 기술 혁명의 하얀 열기" 연설을 통해 기술주의를 강조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했다.[30]

1962년 윌슨

4. 1. 국회 입성 (1945-1947)

전쟁이 끝나자, 윌슨은 곧 있을 총선에서 의석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는 스티븐 킹홀이 차지하고 있던 옴스커크 지역구에 출마하기로 했다. 총선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후보로 지명되는 것에 동의했고, 그 결과 공무원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그는 이 시기에 향상된 능률을 근거로 탄광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석탄을 위한 뉴딜〉을 저술했다.[12]

1945년 총선에서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윌슨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즉시 노동부 정무차관으로 임명되었다. 2년 후, 그는 공급 계약 협상을 위해 소련으로 여러 차례 출장을 갔는데, 훗날 이 출장을 두고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1947년 10월 14일, 윌슨은 31세의 나이로 상무성 장관에 임명되어 20세기 영국 내각 최연소 장관이 되었다. 그는 "통제의 모닥불"이라 불리던 전시 배급제 일부를 폐지하는 데 앞장섰다.[12]

4. 2. 내각 각료 (1947-1951)

직책임기
상무성 국장1947년 10월 14일 - 1951년 4월



1947년 10월 14일, 윌슨은 31세의 나이로 상무성 국장에 임명되어 20세기 영국 내각의 최연소 일원이 되었다.[15] 그는 "통제의 모닥불"로 언급된 전시 배급 철폐를 주도했다.[2] 1949년 중반, 재무장관 스태퍼드 크립스가 건강 회복을 위해 스위스로 간 사이, 윌슨은 애틀리 수상에게 재정 문제에 대한 자문을 하도록 소집된 세 명의 젊은 장관들 중 한 명이었다. (다른 두 명은 더글러스 제이와 휴 게이츠켈이었다.)[19] 윌슨은 한국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국민보건서비스 의료비용 도입에 항의하여 1951년 4월 애뉴린 비반과 함께 정부에서 사임하였다.[22]

4. 3. 야당 시절 (1951-1964)

1945년 영국 총선에서 윌슨은 노동당의 압승과 함께 자신의 의석을 얻었고, 놀랍게도 즉시 노동부 의회 서기로 정부에 임명되었다. 2년 후 그는 공급 계약을 협상하기 위해 소련으로 몇 차례 여행을 떠났고, 해외무역 서기가 되었다. 1947년 10월 14일, 윌슨은 31세의 나이로 상무성 장관에 임명되어, 20세기 영국 내각의 최연소 장관이 되었다. 그는 "통제의 모닥불"로 언급된 전시 배급 일부를 폐지하는 데 앞장섰다.[24]

윌슨은 "좌익"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한국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민 보건 서비스 의료 의무 도입에 항의하여 1951년 4월 정부에서 사임한 애나이린 베번과 뜻을 같이했다. 그해 후반 노동당이 총선에서 패배한 후, 그는 베번의 "좌로 유지" 단체 의장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베번과 거리를 두었다. 공교롭게도 1954년 베번이 "그림자 내각"에서 사임하면서 윌슨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24]

윌슨은 곧 매우 효과적인 그림자 장관임을 입증했다. 그의 절차상 조치 중 하나는 1955년 정부 재정 법안을 무산시켰고, 1956년부터 그림자 재무장관으로서 그의 연설은 명석함과 지력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투기로 파운드화를 끌어내린 것으로 비난받는 스위스 은행원들을 묘사하기 위해 "취리히의 국제적 금융업자"라는 용어를 만들었다.[27] 그는 1955년 영국 총선 패배 이후 노동당 조직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여 당 조직을 낡은 고륜자전거에 비유하고, 개선을 위한 다양한 제안을 했다.[28] 1959년 노동당 패배 이후, 1960년 휴 게이츠컬에게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당의 4조항에 국유화 조항을 삭제하려는 게이츠컬의 시도와 영국의 일방적인 핵무장 해제를 지지하는 운동에 대한 1960년 당 회의에서 게이츠컬이 패배하는 상황에서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윌슨은 1962년 부대표직에 도전했으나 조지 브라운에게 패배했다. 이후 그는 그림자 외무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29]

1963년 1월 게이츠컬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노동당은 통합되고 정부로 선출될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윌슨은 당 대표직을 위한 좌익 후보가 되었다. 당의 우익 후보였던 브라운에 대한 대안으로 제임스 캘러헌이 경선에 참여했으나 첫 라운드에서 탈락했고, 비밀투표의 두 번째 라운드에서 윌슨은 엉뚱한 인물이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조지 브라운을 꺾었다.[29]

윌슨의 1964년 영국 총선 운동은 해럴드 맥밀런보수당 정부에 큰 타격을 준 섹스 스캔들인 1963년 프러퓨모 사건의 도움을 받았다. 이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은 맥밀런의 후임자 앨릭 더글러스흄을 공격하는데 활용했다. 윌슨은 스캔들에 직접 연루되지 않으면서 이득을 취했다. 흄은 하원 의석을 얻기 위해 흄 경으로서 자신의 작위를 포기한 귀족이었다. 윌슨이 그가 제14대 흄 백작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평민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하자, 흄은 "윌슨 씨도 아마 14번째 윌슨 씨일 겁니다"라고 응수했다.[32]

1963년 노동당 연례 회의에서 윌슨은 "제한적 관행이나 산업계 어느 쪽의 구식 조치를 위한 장소가 아닐 이 혁명의 하얀 열기 속에서 영국이 만들어질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과학적, 기술적 변화의 함의에 대한, 자신의 가장 기억에 남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기술주의를 통해 기존 계급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는 윌슨의 평판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30]

4. 4. 야당 대표 (1963-1964)

윌슨은 곧 매우 효과적인 원내총무임을 입증하였다. 그의 절차상 운동들 중 하나는 1955년 정부의 재정 법안의 감소를 일으켰고, 1956년부터 원내총무로서 그의 연설들은 명석함과 지력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사색에 의하여 파운드를 밀어 내린 것으로 기소된 스위스의 은행원들을 묘사하는 데 "취리히의 국제적 금융업자"라는 용어를 만들었다.[1] 그동안 그는 낡은 앞바퀴가 큰 자전거에 당의 조직을 비교하고, 향상을 위하여 다양한 추천들을 만든 1955년 총선에서 그 패배에 이어 노동당의 조직으로 문의를 수행하였다.[1] 1959년 노동당의 패배 이후, 그는 당의 4 조항의 형성에 국유화로 당의 위탁을 도랑 약속을 하는 데 게이츠컬의 논쟁적 시도와 영국의 일방적인 핵무장 해제를 성원하는 운동에 1960년의 당 회의에서 게이츠컬의 패배에 기회주의적 이었지만, 1960년 휴 게이츠컬에 비성공적인 도전을 발포하였다.[1] 윌슨은 또한 1962년 차장직을 위하여 도전하였으나 조지 브라운 남작에 의하여 꺾였다.[1] 이 도전들에 이어 그는 원내 외무 장관의 지위로 옮겨졌다.[1]

노동당이 정부로 선출되는 좋은 기회를 가지는 데 합치고 기대를 걸면서 게이츠컬은 1963년 1월 뜻밖에 사망하였다.[1] 윌슨은 리더십을 위하여 좌익 후보가 되었다.[1] 당의 우측에 브라운에게 양자 택일로서 경주에 들어가 제임스 캘러헌이 첫 라운드에서 제거된 후, 비밀투표의 2번째 라운드에서 똑바른 경쟁에서 그는 엉뚱한 인물로서 평판에 의하여 방해된 조지 브라운을 꺾었다.[1]

윌슨의 1964년 선거 운동은 해럴드 맥밀런보수당 정부를 몹시 상처를 입힌 섹스 스캔들인 1963년 프러퓨모 사건에 의하여 원조되었고,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은 맥밀런의 후임자 앨릭 더글러스흄을 타락시키는 것이었다.[1] 윌슨은 적은 건전한 측면에서 연루되지 않으면서 자본금을 만들었다.[1] 흄은 자신이 하원에서 의석에 앉는 데 흄 경으로서 자신의 타이틀을 포기한 귀족이었다.[1] 그가 제14대 흄 백작이었다는 윌슨의 소감으로 흄은 "난 윌슨 씨가 13대 윌슨 씨라는 것을 가정한다."고 보복하였다.[1]

노동당의 1963년 연례 회의에서 윌슨은 "제한적 관행 혹은 산업의 아무 쪽에 구식 조치를 위하여 장소가 아닐 이 혁명의 하얀 열에서 영국이 위조될 것이다"라고 자신이 주장한 것에 과학적과 기술적 변화의 함축에 자신의 최고로 기억되는 연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1] 이 연설은 우세한 클래스 시스템에 기술주의가 묶이지 않으면서 윌슨의 평판을 세우는 데 많은 일을 하였다.[1]

5. 총리 재임 (1964-1970, 1974-1976)

노동당1964년 영국 총선에서 4석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여 해럴드 윌슨이 총리가 되었다. 1966년 3월에 열린 1966년 영국 총선에서는 96석의 더 큰 다수를 확보하며 재선에 성공했다.[33]

윌슨 총리 재임 초기 3년 동안 경제는 파운드화 평가 절하를 막는 데 집중되었다. 윌슨은 이전 노동당 정부의 파운드화 평가 절하 경험 때문에 "평가 절하의 당"으로 낙인찍힐 것을 우려하여 평가 절하에 저항했다. 그러나 1967년 시장 압력으로 인해 결국 파운드화를 평가 절하해야 했다. 윌슨은 "당신의 주머니에서 파운드"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이는 "가격이 오를 것이다"라는 그의 다음 문장과 함께 비판받았다.

윌슨은 "지시하는 경제적 계획"을 강조하며, 투자와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부를 창설했다. 산업 국유화와 관련하여 철강업 재국유화를 추진했지만, 당 헌법의 국유화 조항(4조)은 유지하는 등 미묘한 접근을 취했다. 또한,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 "가격 수입 정책"으로 알려진 임금 통제를 시도했고, 이로 인해 정부는 주요 산업 분쟁에 자주 개입하게 되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와 함께 (1965년)


1964년, 대영 제국으로부터의 철수가 이미 진행 중이었던 상황에서 윌슨은 로디지아의 미래에 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흑인 다수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 이언 스미스 총리의 백인 소수 정부에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1965년 11월 11일 일방적 독립을 선언했고, 윌슨은 군사 개입 대신 국제 연합을 통한 제재를 선택했다.

백악관에서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회담하는 윌슨 총리


베트남 전쟁에서 윌슨은 미국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영국군 파병 압력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거부하고 중재 노력을 기울였다. 1966년 6월 28일, 미국의 하노이하이퐁 폭격에 대해 자신의 정부를 분리시켰다.

1967년, 윌슨 정부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을 위한 두 번째 신청을 제출했지만, 프랑스 샤를 드 골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었다. 같은 해, "수에즈 운하 동부" 주요 기지들로부터 군사력을 철수시킨다고 발표하여 영국의 제국을 종식시키고, 20세기 영국의 지구촌 국방 전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타인 위어주 워싱턴의 한 양로원을 방문한 윌슨


윌슨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사형 폐지, 동성애자 간 합의된 성관계 비범죄화, 낙태 자유화, 이혼 개혁, 극장 검열제 폐지 등 다양한 사회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교육이 근로자 계급 어린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는 핵심이라고 믿었고, 오픈 대학교를 설립하여 고등 교육 기회를 놓친 성인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제공했다.

1970년 총선에서 패배한 후, 야당 대표로 남았다. 1974년 2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소수 노동당 정부를 이끌며 총리직에 복귀했고, 그해 10월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윌슨은 유럽 공동체(EC) 가입 문제에 대해 당내 양측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입장을 만들어냈다. 1974년 선거 공약에 따라 영국의 회원 가입 조건을 재협상하고, 1975년 6월 5일 새로운 조건에 따른 유럽 공동체 잔류 여부에 대한 국민 투표를 개최하여 잔류를 확정지었다.

1960년대 후반, 윌슨 정부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발발을 목격했다. 1971년, 아일랜드 통일을 위한 16개 조항, 15년 계획을 제안했지만, 당시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6년 3월 16일, 윌슨은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항상 60세에 은퇴할 계획이었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지쳤다고 밝혔다.

5. 1. 제1차 윌슨 정부 (1964-1970)

1964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4석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여 해럴드 윌슨이 총리가 되었다. 윌슨은 48세로, 로즈베리 경 이후 70년 만에 최연소 총리였다.[33] 1965년 보궐선거 패배로 정부의 과반수는 단 한 석으로 줄었지만, 1966년 총선에서 윌슨은 다시 총선을 치르는 승부수를 던져 노동당이 보수당보다 96석 많은 과반수를 확보했다.[33]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윌슨의 노동당 정부는 사회보장,[34] 시민 자유,[35] 주택,[36] 보건,[37] 교육,[38] 노동자 권리[39]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내무장관 로이 젠킨스가 주도하거나 지지한 자유주의적 사회 개혁은 주목할 만하다.[40]

윌슨 정부는 경제 계획을 통해 영국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경제부(DEA)를 설립하여 성장과 투자를 촉진하는 국가 계획을 수립하고, 연구 개발을 지원하는 기술부(Mintech)를 신설했다.[40] 윌슨은 과학적 진보가 경제, 사회 발전의 핵심이라고 믿었고, "기술의 백열"을 언급하며 영국 산업의 현대화를 강조했다.[40]

그러나 집권 직후 8억 파운드의 무역수지 적자에 직면했고, 많은 경제학자들은 평가절하를 주장했지만, 윌슨은 이를 거부했다.[41] 1949년 노동당의 파운드화 평가절하 경험 때문에 노동당이 "평가절하 정당"으로 낙인찍힐 것을 우려했고, 평가절하가 저소득층과 영연방의 파운드화 지역 국가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41] 대신 정부는 수입에 대한 임시 추가 관세와 디플레이션 조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41]

결국 1967년 11월, 시장 압력으로 정부는 파운드화를 14% 평가절하해야 했다.[40] 윌슨은 "주머니 속 파운드"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많은 비판을 받았다.[43] 평가절하와 긴축 조치 이후 1969년 무역 수지는 흑자로 돌아섰다.[40]

1965년 DEA가 작성한 국가 계획은 연간 성장률 3.8%를 목표로 했지만,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실제 평균 성장률은 2.2%에 그쳤다. DEA는 1969년에 해체되었다.[40]

산업 국유화와 관련하여 윌슨은 1967년 철강법에 따라 철강 산업을 재국유화하여 영국 철강 공사를 설립했다.[40] 1968년에는 지로뱅크를 설립하여 우정청 네트워크를 통해 운영되는 공공 소유 은행 서비스를 제공했다.[46]

윌슨 정부는 재임 기간 동안 실업률이 증가하는 것을 경험했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평균 실업률은 1.6%였고, 1966년부터 1970년까지 평균 실업률은 2.5%였다.[40]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윌슨 정부는 사회 서비스, 보건, 복지, 주택 분야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확장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49]

5. 1. 1. 경제 정책

윌슨 정부는 경제를 안정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 파운드화 평가 절하: 1964년 집권 당시 윌슨 정부는 무역수지 적자에 직면했다. 파운드화 평가 절하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1967년 시장 압력으로 결국 평가 절하를 단행해야 했다.[40] 윌슨은 "주머니 속 파운드"의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많은 비판을 받았다.[43]
  • 경제 계획: 윌슨 정부는 "지시하는 경제적 계획"을 강조하며, 투자와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경제부(DEA)를 신설했다.[40] 국가경제개발위원회와 같은 기존 기구들을 활용하고 강화했다.[44]
  • 산업 정책: 윌슨은 산업 국유화에 대한 미묘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 1967년 철강법을 통해 철강 산업을 재국유화하여 영국 철강 공사를 설립했지만, 당 헌법의 국유화 조항(4조)은 유지했다.[40]
  • 임금 통제: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 "가격 수입 정책"으로 알려진 임금 통제를 시도했다. 이로 인해 정부는 주요 산업 분쟁에 자주 개입하게 되었다.[33]
  • 지로뱅크 설립: 1968년, 우정청 네트워크를 통해 운영되는 공공 소유 은행인 지로뱅크를 설립했다. 이는 은행 계좌가 없는 노동 계층 사람들을 위한 "국민 은행"으로 불렸다.[46]


윌슨 정부의 경제 정책은 초기 기대와 달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실업률은 재임 기간 동안 증가했으며, 경제 성장률은 목표치에 미치지 못했다.[40]

5. 1. 2. 사회 정책

해럴드 윌슨 총리 재임 기간은 사형 폐지, 동성애자 간 합의된 성관계 비범죄화, 낙태 자유화, 이혼 개혁, 극장 검열제 폐지 등 다양한 사회적 개혁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러한 개혁들은 대부분 당파를 초월한 투표로 채택되었지만, 1966년 이후 노동당의 큰 의석 과반수는 이전 의회들보다 이러한 변화에 더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40] 윌슨 개인은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지역 출신이었기에 이러한 개혁에 큰 열정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특히 내무부에서 로이 젱킨스의 주도로 개혁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윌슨의 1966년 ~ 1970년 집권 기간 동안 영국으로의 이민 증가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커졌다. 보수당 정치인 에노크 파월은 "피의 강들" 연설을 통해 이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윌슨 내각에서 해임되었다. 윌슨 정부는 인종 차별을 비난하는 한편, 내무 장관 제임스 캘러헌은 영국 이민 권리에 대한 새로운 제한 조치를 도입하는 이중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50]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사회보장,[34] 시민 자유,[35] 주택,[36] 보건,[37] 교육,[38] 노동자 권리[39]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내무장관 로이 젠킨스가 주도하거나 지지한 자유주의적 사회 개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40]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남성 동성애 부분적 비범죄화 및 낙태 허용
  • 이혼법 개정
  • 연극 검열 폐지
  • 사형제도 폐지 (소수의 범죄 – 특히 반역죄는 제외)
  • 인종 관계 및 인종 차별 관련 법률 제정[40]


또한, 비기여 복지 혜택에 대한 소득 조건 심사 완화, 연금의 소득 연동, 산업 재해 보상 제공 등을 추진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포괄적 교육 확대와 오픈 유니버시티 설립이 두드러진다.[40]

5. 1. 3. 교육 정책

윌슨은 교육이 근로자 계급 어린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는 핵심이라고 믿었다.

노동당 집권 시기에 맞춰, 윌슨은 로빈스 보고서의 제안에 따라 새로운 대학들을 빠르게 설립하는 정책을 이어갔다. 비록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3차 교육 자원 시스템은 부족했지만, 대학 확장은 핵심 정책으로 남았다. 이 정책의 두드러진 효과 중 하나는 여성들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윌슨은 또한 오픈 대학교 설립을 통해 고등 교육 기회를 놓친 성인들에게 파트타임 학습과 원격 교육을 통한 두 번째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노동당 좌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제니 리에게 이 사업을 맡겼다.

반면, 중등 교육 부문에서 윌슨의 정책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1944년 교육법에 따라, 우수 학생들을 위한 그래머 스쿨과 대다수 학생들을 위한 기술 중등학교로 나뉘는 삼분 체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의 능력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을 위한 종합 중등학교로 대체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고, 이는 노동당의 정책이 되었다.

노동당은 많은 그래머 스쿨을 종합 중등학교로 전환하도록 지방 정부에 권한을 부여했다. 이러한 전환은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 정부 시기에도 계속되었지만, 마거릿 대처 교육부 장관은 지방 정부의 전환 강제를 중단시켰다. 학교 수준 향상을 목표로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래머 스쿨의 우수성이 다른 학교들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희생되었다고 느꼈다. 또한, 경제 긴축으로 인해 학교들은 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지 못했다.

또 다른 문제는 교사 훈련에서 "진보적인" 아동 중심 방법이 도입된 것이었는데, 이는 많은 기존 교사들에게 무시당했다. 동시에 교직은 점차 정치화되었고, 교사의 전문성은 어려움을 겪었고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1964년 중등 교육의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변화는 늦었지만, 변화가 이루어진 방식은 확실히 비판의 여지가 있었다. 이 문제는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집권했을 때 우선 과제가 되었다.

1966년, 윌슨은 새로 개교한 브래드퍼드 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어 1985년까지 재직했다.

5. 1. 4. 외교 정책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미국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 군대의 최소한 상징적인 참여를 요청했지만, 윌슨은 말레이 반도 비상사태와 1954년 제네바 협정의 영국 공동 의장직을 이유로 영국군의 파병을 꾸준히 거부했다.[118] 윌슨 정부는 미국 입장에 대해 일부 수사적인 지지를 제공했다.[111] 영국 정부는 갈등 조정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66년 6월 28일 윌슨은 미국의 하노이하이퐁 폭격에 대해 그의 정부를 '분리'시켰다.[123]

윌슨은 미국과의 강력한 "특별 관계"를 믿었고, 백악관과의 관계를 강조하고자 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윌슨을 싫어했고 어떤 "특별한" 관계도 무시했다. 베트남 전쟁은 껄끄러운 문제였다.[110] 역사가 조나단 콜먼은 이것이 20세기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특별한" 관계를 만들었다고 결론짓는다.[112] 완전히 동의한 유일한 점은 존슨과 윌슨 모두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강력히 지지했다는 것이다.[113]

윌슨이 직면한 더 어려운 정치적 딜레마 중 하나는 현재의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의 영국 가입 문제였다. 1963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에 의해 가입 시도가 거부되었다. 야당인 노동당은 이 문제에 대해 분열되어 있었고, 휴 게이츠켈은 1962년 영국의 유럽 공동체 가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114] 초기 주저 끝에 윌슨 정부는 1967년 5월 유럽 공동체 가입을 위한 영국의 두 번째 신청을 제출했다. 그러나 드골에 의해 1967년 11월 거부되었다.[115] 드골이 실각한 후 보수당 총리 에드워드 히스는 1973년 영국의 EC 가입을 협상했다.

야당 시절 윌슨은 히스가 협상한 조건에는 반대했지만 원칙적으로 회원 자격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노동당의 1974년 선거 공약에는 영국의 회원 자격 조건을 재협상하고 새로운 조건으로 EC 잔류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윌슨이 다시 집권한 후, 영국 동료 EC 회원국들과의 재협상은 윌슨 자신이 외무장관 제임스 캘러핸과 함께 진행했고, 그들은 유럽 각국의 수도를 돌아다니며 유럽의 동료들과 만났다. 논의는 주로 EC에 대한 영국의 순 예산 기여에 초점이 맞춰졌다. 재협상 과정에서 다른 EEC 회원국들은 부분적인 상쇄 조치로 상당한 유럽 지역 개발 기금(ERDF)을 설립하는 데 동의했고, 영국이 주요 순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116]

이후 국민투표 운동에서, 정부 구성원은 질문의 양측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었다. 유권자들은 1975년 6월 5일 투표에서 압도적인 다수로 회원 자격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117]

1967년 7월 국방장관 데니스 힐리는 영국이 1977년까지 수에즈 동쪽의 본토 기지를 포기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필요한 경우 해당 지역에 배치될 수 있는 공수부대는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그 직후인 1968년 1월 윌슨은 이 철수 계획의 시간표를 앞당길 것이며, 영국군은 1971년 말까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및 페르시아만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20]

윌슨은 강력한 친이스라엘 성향으로 알려져 있었다.[121] 그는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와 특별한 친구였는데, 이 세 사람 모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회원이었다.[122]

1964년까지 영국의 "제국으로부터의 철수"는 상당한 진전을 보였고, 윌슨 정부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남로디지아는 독립을 허가받지 못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윌슨이 로디지아 총리 이언 스미스가 이끄는 백인 소수 정부에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무제한적인 투표권을 부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미스의 반항적인 대응은 1965년 11월 11일의 일방적 독립 선언이었다. 윌슨의 즉각적인 대응은 유엔으로 향했고, 1965년 안전 보장 이사회는 제재를 가했으며, 이는 1979년 공식적인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윌슨은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한 것에 대해 대부분의 국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 국가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아 효율성을 저해했다. 여론의 특정 부분에서는 제재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고, 무력으로 정권을 타도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윌슨은 영국 국민이 "혈연 관계"에 있는 이들에 대한 그러한 행동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로디지아에 군사력으로 개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두 지도자는 1966년 HMS 타이거와 1968년 HMS 피어리스에서 영국 군함 위에서 회담을 가졌다. 스미스는 이후 회고록에서 윌슨을 공격하며, 협상 중 지연 전술을 사용했고 이중적인 행동을 했다고 비난했고, 윌슨은 스미스의 성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합의가 눈앞에 보일 때마다 스미스가 목표를 바꾸었다고 주장하며 맞섰다.[123] 이 문제는 1976년 윌슨이 사임할 때까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5. 2. 1970년 총선 패배와 야당 복귀

1969년까지 노동당은 심각한 선거 패배를 겪었고, 1970년 초까지 이전 총선 이후 보궐선거에서 총 16석을 잃었다.[128]

1970년까지 경제는 개선의 조짐을 보였고, 그해 5월까지 노동당은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을 앞섰다.[129] 윌슨은 정부의 인기 회복세에 발맞춰 총선을 실시했지만, 대부분의 관찰자들의 예상과 달리 에드워드 히스가 이끄는 보수당에게 패배했다.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노동당의 승리를 예측했으며, 선거 6일 전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이 12.4%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거 직후 《타임스》의 조지 클락 기자는 1970년 선거를 "영국 국민이 여론조사 결과를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얼굴에 던져 돌려주고 투표소에서 그들을 틀렸다고 증명한 사건, 그것도 대부분 심하게 틀렸다고 증명한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썼다.[130] 히스와 보수당은 경제 문제를 두고 윌슨을 공격했다. 선거 막바지에 5월의 나쁜 무역 수치가 히스의 선거 운동에 무게를 더했고, 그는 노동당이 승리하면 추가적인 평가절하가 초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윌슨은 히스의 주장을 "무책임하고 국가에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131] 그러나 결국 선거에서 노동당의 득표율은 1935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132] 노동당의 여러 저명한 인물들이 의석을 잃었는데, 특히 당시 노동당 부당수였던 조지 브라운이 대표적이다.[133]

1970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패배한 후에도 윌슨은 야당 노동당 당수직을 유지했다. 1973년 8월, 실리 제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그는 작은 보트에서 모터보트에 오르려다 바다에 빠졌다. 그는 모터보트에 오르지 못하고 30분 이상 차가운 물에 떠 있었고, 모터보트의 펜더를 잡고 있었다. 소설가 이자벨 볼프의 아버지인 폴 볼프에 의해 구조되기 전까지 그는 거의 죽을 뻔했다. 다음 달에 이 사건이 공개되자 윌슨은 그 심각성을 축소했지만, 언론에 의해 크게 다뤄지면서 다소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았다. 그의 보도 담당관인 조 헤인즈는 윌슨의 개 패디를 문제의 원인으로 돌리면서 여론을 돌리려 했다.[134]

1974년 초, 윌슨은 사칭 사기의 피해자가 되었다. 스태퍼드셔의 부동산 개발업자 로널드 밀헨치는 전 총리로부터 온 것처럼 위조된 편지를 만들었다.[135] 밀헨치는 부동산 거래 협상에 관여했는데, 자금을 조달할 수 없자 기자를 만나 윌슨이 이 거래에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밀헨치는 더 나아가 노동당의 선거 승산에 "결정타"를 날리고 싶었고, 그 편지를 25000GBP에 팔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74년 11월, 밀헨치는 위조, 절도 및 총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36]

닉슨 쇼크와 1973년 석유 위기로 인해 1970년대 영국과 다른 많은 서구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고, 히스 정부는 1973년 말 경제적 어려움과 노동 불안(특히 탄광 노동자들과의 대립으로 이어진 3일 근무제)에 시달렸다. 그리고 1974년 2월 7일(위기가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에서) 히스는 2월 28일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137]

윌슨은 야당에서 노동당 당수로서, 프랑스에서 샤를 드 골의 권력에서 물러남에 이어 히스 행정부에 의하여 협상되어 온 유럽 공동체 가입 문제라는 정치적 딜레마에 직면해야 했다. 노동당은 이 문제에 깊게 나뉘었고 윌슨은 당의 양쪽이 동의할 수 있던 안출된 지위에서 정치적 독창력을 보였다. 1974년 윌슨의 선언서는 영국의 회원 가입을 위한 조건을 재협상하겠다고 약속을 포함하였고, 그러고 나서 새로운 조건에 유럽 공동체에서 머무느냐에 국민 투표를 개최하였다. 국민 투표는 1975년 6월 5일 정식으로 열렸다. 대중을 성원하는 데 요구된 그 회원들의 지위를 차지하는 정부의 보통적 영국의 전통이기 보다 정부의 일원들은 의문의 양쪽에 그들의 견해를 제시하는 데 자유로웠다. 이 투표에서 유럽 공동체 잔류가 통과되었다.

5. 3. 제2차 윌슨 정부 (1974-1976)

윌슨은 야당에서 노동당 당수로 남아있었다. 1974년 2월 영국 총선에서 에드워드 히스 아래의 보수당 정부를 꺾고 소수 노동당 정부의 지도자로 다우닝가 10번지에 복귀했다. 그해 10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윌슨이 야당에서 직면했던 가장 어려운 정치적 문제 중 하나는 유럽 공동체(EC) 가입 문제였다. 프랑스에서 샤를 드 골이 실각한 후 히스 정부에 의해 협상된 이 문제는 노동당을 분열시켰다. 윌슨은 당의 양쪽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입장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독창성을 보였다. 1974년 윌슨의 선거 공약은 영국의 회원 가입 조건을 재협상하고, 새로운 조건에 따라 유럽 공동체 잔류 여부에 대한 국민 투표를 개최하겠다고 약속했다. 1975년 6월 5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정부 구성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었다. 투표 결과, 유럽 공동체 잔류가 확정되었다.

1960년대 후반 윌슨 정부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발발을 목격했다. 북아일랜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윌슨은 1969년 8월 평화 유지를 위해 영국군 파병에 동의했다.

1971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윌슨은 아일랜드 통일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는 16개 조항, 15년 계획을 공식화했다. 이 제안은 당시 히스 정부에 의해 원칙적으로 환영받았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1974년 5월, 윌슨은 얼스터 연합당이 주도한 얼스터 노동자 파업을 "종파적 파업"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파업 노동자들을 위협하는 얼스터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에 맞서기 위해 영국군에 압력을 가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후 텔레비전 연설에서 그는 파업 노동자들과 그 지지자들을 영국이 그들의 생활비를 지급하기를 기대하는 "기생충(spongers)"이라고 불렀다. 2주간의 파업은 결국 권력 분점 북아일랜드 행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5. 3. 1. 국내 정책

제2차 윌슨 정부는 영국의 복지 국가 확대에 주력하여 교육, 보건, 주택 임대료에 대한 지출을 늘렸다.[86] 이를 위해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고 통제를 실시했다. 새 재무장관 데니스 힐리는 1971년 최고 세율을 90%에서 75%로 인하했던 것을 부분적으로 되돌려 83%로 인상했으며, 이는 1974년 4월 법률로 제정되었다. 투자 소득에 대한 추가 부담금을 도입하여 투자 소득에 대한 최고 세율을 98%로 인상했다.

사회 정책에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윌슨 정부는 1975년 실업률 상승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4월까지 실직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139]

윌슨의 제2차 정부는 세계적 경기침체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출범했다. 이는 1973년 석유 위기와 이전 정부의 성장 촉진을 위한 인플레이션 정책 때문이었다.[140] 정부는 인플레이션(1975년 26%에 달함)에 대처하기 위해 노동조합총연맹과 '사회 계약'을 협상하여 자발적 소득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은 향후 몇 년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1978년에는 인플레이션이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138] 1976년에는 경기침체가 끝나고 경제 회복이 시작되었으며,[140] 1978/79년에는 생활 수준이 1973/74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141] 1974년부터 1979년 사이에 연금이 실질적으로 20% 증가했고, 임대료 및 가격 통제, 식량 및 교통 보조금과 같은 조치는 더 많은 사람들의 생활 수준에 미치는 악영향을 완화했다.[142]

정부의 산업 정책은 경제학자 스튜어트 홀랜드와 산업부 장관 토니 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정책의 중심에는 1975년 설립된 국가기업위원회(NEB)가 있었는데, 이는 민간 기업의 지분을 인수하는 대가로 공공 투자를 산업에 유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NEB는 경제의 국유화를 확대하고 산업 재생에 투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영국 레일랜드와 같은 부실 기업을 지탱하는 것이 주요 활동 중 하나가 되었다. 정부는 또한 1967년에 처음 설립된 지역 고용 프리미엄을 증가시킴으로써 지역 개발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138][143]

5. 3. 2. 유럽 공동체(EC) 재협상과 국민투표

1974년 노동당의 선거 공약에는 영국의 유럽 공동체 회원 자격 조건을 재협상하고, 새로운 조건으로 EC 잔류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영국 역사상 전례가 없는 헌법 절차였다.[114]

윌슨이 다시 집권한 후, 영국은 EC 회원국들과 재협상을 진행했다. 윌슨 자신과 제임스 캘러핸 외무장관은 유럽 각국의 수도를 방문하여 유럽의 동료들과 만났다. 논의는 주로 EC에 대한 영국의 순 예산 기여에 초점이 맞춰졌다.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소규모 농업 생산국인 영국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어려움을 겪었다.

:(i) EC 예산에서 농업 지출의 우세

:(ii) EC 수입의 원천으로서의 농업 수입 관세.

재협상 과정에서 다른 EEC 회원국들은 부분적인 상쇄 조치로 상당한 유럽 지역 개발 기금(ERDF)을 설립하는 데 동의했고, 영국이 주요 순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116]

이후 국민투표 운동에서, 정부가 모든 내각 구성원이 공개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정책 입장을 취하는 일반적인 영국의 "집단 책임" 전통과는 달리, 정부 구성원은 EC 잔류 혹은 탈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었다. 유권자들은 1975년 6월 5일 투표에서 압도적인 다수로 회원 자격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117]

5. 3. 3. 북아일랜드 문제

1960년대 후반, 윌슨 정부는 북아일랜드 분쟁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북아일랜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윌슨은 1969년 8월 평화 유지를 위해 영국군 파병에 동의했다.[144]

1971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윌슨은 아일랜드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한 16개 조항, 15년 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당시 히스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44]

1974년 5월, 소수 정부의 총리로 복귀한 윌슨은 얼스터 연합당이 주도한 얼스터 노동자 파업을 "종파적 파업"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파업 노동자들을 위협하는 얼스터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에 맞서기 위해 영국군에 압력을 가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후 텔레비전 연설에서 그는 파업 노동자들과 그 지지자들을 영국이 그들의 생활비를 지급하기를 기대하는 "기생충(spongers)"이라고 불렀다. 2주간 이어진 파업은 결국 권력 분점 북아일랜드 행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1975년, 윌슨은 비밀리에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의 무장을 중단하도록 1400만파운드를 제안했지만, 카다피는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요구했다.[147][148] 이 제안은 2009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5. 4. 총리직 사임 (1976)

1976년 3월 16일, 윌슨은 총리직 사임을 발표하여 국가를 놀라게 했다.[138] 그는 항상 60세에 은퇴할 계획이었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지쳤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그는 스톤 경이 된 주치의 조셉 스톤 경과 같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총리로서 8년 혹은 9년 이상 일할 의향이 없다고 말했다.

로이 젠킨스는 윌슨이 충성스럽고 오랫동안 고통받던 그의 아내 메리의 정치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부분적으로 동기가 부여되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2] 그의 주치의는 나중에 대장암으로 진단될 문제를 발견했고, 윌슨은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해 낮에 브랜디를 마시기 시작했다.[5] 게다가 1976년까지 그는 이미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병의 초기 단계를 인지하고 있었을 수 있는데, 이는 이전에 뛰어났던 그의 기억력과 집중력을 극적으로 저하시켰다.[149]

그의 사임을 특별하게 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식사를 하러 왔는데, 이는 그녀가 윈스턴 처칠 경에게만 주었던 영예였다.

윌슨의 사임 명예 수여에는 그의 정치적 지지자들과 함께 많은 사업가와 유명인들이 포함되었다. 그의 임명은 그의 명성에 지속적인 손상을 입혔고, 명단 초안이 그의 정치 비서 마시아 윌리엄스가 라벤더색 편지지에 작성했다는 제안으로 악화되었다("라벤더 목록"으로 알려짐). 로이 젠킨스는 윌슨의 은퇴는 "최소한으로 말해 기이한 사임 명예 수여 명단으로 인해 손상되었는데, 이 명단은 몇몇 모험적인 사업가들에게 작위나 기사 작위를 수여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그와 노동당과 가깝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2] 윌슨이 명예를 준 사람들 중에는 가넥스(윌슨이 선호하는 레인코트)의 발명가인 케이건 경(결국 사기 혐의로 투옥됨)과 나중에 부패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는 동안 자살한 에릭 밀러 경이 포함되었다.

노동당은 윌슨을 당 대표이자 총리로 대체하기 위한 선거를 치렀다. 마이클 풋, 제임스 캘러헌, 로이 젠킨스, 토니 벤, 데니스 힐리, 앤서니 크로슬랜드 6명의 후보가 1차 투표에 출마했다. 4월 5일 3차 투표에서 캘러헌은 의회 투표에서 풋을 176 대 137로 물리치고 1979년 5월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다.

윌슨은 퇴임 후에도 하원 의원직을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퇴임하는 총리에게 관례적으로 주어지는 귀족 작위를 즉시 받지 못했지만, 대신 가터 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다.[150][151][152] 그는 1979년 마지막 선거에서 휴이턴의 후방 의원으로 돌아왔다. 하원을 떠난 후 1983년 총선 전 38년간의 봉사 후, 그는 서요크셔 주 커클리스에 있는 '''리보 밸리의 윌슨 남작'''으로 생애 귀족 작위를 받았다. 그의 고향 요크셔 북부에 있는 리보 밸리 수도원을 따서 지어졌으며, 커클리스는 허더즈필드에 있는 그의 집 주소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의 작위의 일부가 아니다.

6. 은퇴 이후와 사망

윌슨은 퇴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정신적 쇠퇴가 뚜렷해졌고, 1987년 이후로는 공개 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1976년 금융기관 기능 검토 위원회(윌슨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980년 6월 보고서를 발표했다.[153]

수상직에서 물러난 직후, 윌슨은 데이비드 프로스트와 함께 일련의 인터뷰/토크쇼 프로그램 진행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시범 방송은 윌슨이 비공식적인 형식에 불편함을 느껴 실패로 끝났다. 그는 BBC 토크쇼인 ''프라이데이 나이트, 새터데이 모닝'' 두 편도 진행했지만, 이 역할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2000년 채널 4는 그의 출연 중 하나를 TV 최악의 순간 100선 중 하나로 선정했다.

평생 길버트와 설리번의 팬이었던 그는 1975년 당시 런던 시장이었던 휴 원트너 경의 초청으로 도일리 카르트 트러스트 이사회에 합류했다.[154] 1978년 크리스마스에는 ''모어캠브 앤드 와이즈'' 크리스마스 특집에 출연했고, 1980년에 다시 한번 이 쇼에 출연했다.

윌슨은 상원에서 특별히 활동적이지는 않았지만, 1984년 5월 실업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155] 그의 마지막 연설은 1986년 해상 조종에 관한 토론에서였는데, 그는 트리니티 하우스의 장로 형제로서 의견을 밝혔다.[156] 같은 해 그는 앵글리아 텔레비전 드라마 ''인사이드 스토리''에서 전 총리로서 자신을 연기했다.[157]

은퇴 후 알츠하이머 관련 치매가 악화되어 전 총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쓰고 연설을 통해 수입을 얻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의 전 보도 비서관인 조 헤인즈는 "그는 자신의 돈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신 상태 때문에 기사를 쓰거나 연설을 할 수 없었고, 그의 수입은 전 총리로서 받는 연금이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윌슨은 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교에 자신의 개인 서류를 212500GBP에 판매하려고 시도했다. 정부는 이러한 방식을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고, 대신 1991년 익명의 기증자들이 자금을 제공하여 옥스퍼드보들리 도서관이 윌슨의 서류를 매입하여 영국에 보존하는 동시에 수익금으로 윌슨과 그의 아내를 위한 신탁 기금을 조성할 수 있도록 했다.[158]

1986년 윌슨


윌슨은 1995년 5월 24일 79세의 나이로 대장암알츠하이머병으로 사망했다.[161] 그의 사망은 그의 전임자 알렉 더글러스-홈의 사망보다 5개월 앞섰다.

윌슨의 추모 예배는 1995년 7월 1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찰스 왕세자, 전 총리 에드워드 히스, 제임스 캘러헌, 마거릿 대처, 현직 총리 존 메이저, 그리고 당시 야당 대표였고 후에 총리가 된 토니 블레어가 참석했다. 윌슨은 6월 6일에 세인트 메리스 구교회(St Mary's Old Church), 세인트 메리스(Scilly 제도)에 매장되었다.[2] 그의 묘비명은 ''Tempus Imperator Rerumla''(시간이 만물의 지배자이다)이다.[162]

세인트 메리스(Scilly 제도)(St Mary's, Isles of Scilly)에 있는 해럴드 윌슨의 묘

7. 유산과 평가

윌슨은 자신을 "서민의 사람"으로 묘사하며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힘썼다. 그는 요크셔 사투리를 유지하고, 노동자 계급의 간넥스(Gannex) 레인코트를 입고, 파이프 담배를 즐겼으며, HP 소스와 같은 영국 대중 음식과 허더즈필드 타운(Huddersfield Town) 축구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168] 이러한 이미지는 그가 "13년간의 보수당의 잘못된 통치" 이후 영국을 현대화할 적임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기여했다.[169]

1965년 윌슨은 비틀즈에게 MBE를 수여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이는 젊은 세대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윌슨이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있다는 인식을 강화했다. 비록 일부 보수층과 고령층의 반발도 있었지만, 당시 투표 연령을 고려하면 큰 영향은 없었다. 이 사건은 윌슨을 현대적인 지도자로 각인시키고, '신 영국'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170] 그러나 비틀즈는 윌슨을 풍자하는 노래 "택스맨(Taxman)"을 발표하기도 했다.[171]

윌슨은 팝 그룹 더 무브(the Move)의 홍보용 엽서에 자신의 캐리커처가 사용되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 이 사건으로 해당 노래의 저작권은 윌슨이 지정한 자선 단체에 귀속되었다.[172]

윌슨은 에드워드 히스의 자유 시장 정책을 비판하며 '셀스던 맨(Selsdon Man)'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는 필트다운인(Piltdown Man)과 같은 인류학적 발견에 빗대어 보수당 정책의 퇴행성을 강조한 것이다.[173] 또한 "기술 혁명의 백열(백열의 열기)", "정치에서 일주일은 매우 긴 시간"과 같은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174] 그는 1967년 파운드화 평가절하 이후 "여러분의 주머니에 있는 파운드의 가치가 더 이상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라는 발언으로 유명해졌다.[175]

윌슨의 명성은 두 번째 총리직 이후 크게 하락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되었다. 2011년 여론 조사에서 윌슨은 전후 노동당 최고 지도자 중 3위를 차지했다.[176] 2006년 글렌 오하라는 윌슨의 경제적 실패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과학 및 교육 지출 증가, 산업 투자 증가 등 긍정적인 업적도 있었다고 평가했다.[177]


  • 비틀즈의 「택스맨」의 가사에 등장하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 1958년 2월 뮌헨 비행기 참사에서 기장에 대한 처우에 대해 언급하며, 동 사고의 재조사가 이루어지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로 인해 기장의 과실이 벗겨지게 되었다.
  • 1979년 9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텍사스 공과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미국의 중국관에 대해 비판했다. 강연에서는 중국이 소비에트 연방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에 불과하며, 악당으로 여겨져 온 소비에트 연방이 중국을 혐오한다고 해서 중국이 선인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하며, 중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207]

7. 1.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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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판과 논란

비틀즈의 노래 택스맨 가사에 등장하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979년 9월 미국 텍사스 공과대학교 강연에서 중국을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로 규정하며, 소련을 혐오한다고 해서 중국이 선하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중국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207] 1958년 2월 뮌헨 비행기 참사에서 기장에 대한 처우에 대해 언급하며 재조사를 이끌어내 기장의 과실을 벗겨내기도 했다.

8. 1. 음모론

1963년, 소련에서 망명한 아나톨리 골리친은 해럴드 윌슨이 KGB 요원이라고 비밀리에 주장했다.[178] 대부분의 정보 장교들은 골리친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중앙정보국(CIA) 방첩 작전 부국장 제임스 제수스 앵글턴 등 일부는 그를 신뢰하여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전 MI5 요원 피터 라이트는 자신의 회고록 ''스파이캐처''에서 30명의 MI5 요원이 윌슨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에 협력했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이 주장을 철회하고 단 한 명의 요원만 있었다고 말했다.[179]

1987년 3월, 전직 요원 제임스 밀러는 1974년 얼스터 노동자 평의회 파업이 윌슨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MI5에 의해 조장되었다고 주장했다.[180] 같은 해 7월, 노동당 의원 켄 리빙스턴은 북아일랜드의 전 육군 언론 담당관 콜린 월러스의 1975년 주장을 인용하며 윌슨을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크리스 멀린 의원은 1988년 11월 23일 연설에서 피터 라이트 이외의 다른 정보원들도 MI5가 윌슨 정부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했다고 주장했다.[181]

2006년 3월 16일 BBC 텔레비전 프로그램 ''해롤드 윌슨에 대한 음모''는 윌슨 정부에 대한 쿠데타 위협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좌우 양측의 주요 인물들이 이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윌슨은 두 명의 BBC 기자에게 자신이 MI5에 의해 약화되고 있다고 우려한다고 말했다. 1974년 영국 육군은 히드로 공항을 점령했는데, 이는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IRA) 테러 행위에 대한 훈련으로 알려졌지만, 10 다우닝가는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고 윌슨은 이를 군의 경고로 해석했다.[183]

역사가 크리스토퍼 앤드류의 MI5 공식 역사 ''왕국의 방위: MI5의 공인 역사''에는 1970년대 윌슨에 대한 음모는 없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해롤드 윌슨을 편집증 환자로 묘사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며, "음모가 상세한 계획을 가진 고위급의 엄격하게 조직된 공모로 정의된다면 '음모'에 대한 증거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음모의 증거는 있다."라고 덧붙였다.[184]

마가렛 대처 총리는 1987년 5월 6일 하원에서 보안국 국장이 "그러한 주장에 대한 진실을 입증하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185][186]

2009년, ''왕국의 방위''는 MI5가 1945년부터 윌슨에 대한 파일을 보관했지만, 그를 도청하거나 음모를 꾸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87] 2010년 신문 보도에서는 내각부가 10 다우닝가 도청에 관한 부분을 역사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188]

윌슨은 영국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을 우려하여 윌슨 독트린이라는 정책을 통해 국회의원의 전화를 도청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9. 서훈

10. 기타


  • 비틀즈의 택스맨 가사에 등장하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 1958년 2월 뮌헨의 비극에서 기장에 대한 처우에 대해 언급하며, 이 사고의 재조사가 이루어지는 계기를 만들었고, 기장의 과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 1979년 9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텍사스 공과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미국의 중국관에 대해 비판했다. 강연에서 중국소비에트 연방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일 뿐이며, 악당으로 여겨져 온 소비에트 연방이 중국을 혐오한다고 해서 중국이 선인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하며, 중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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